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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쓰네의 주변 아사라기 지로

 수도에서 내려온 요시쓰네가 직접 본 건물로, 지금도 남아있는 것은 간잔에 있는 주손지 절의 곤지키도(金色堂)와 경장뿐이다. 주손지 절은 후지와라씨 1대 기요히라가 거주지를 도요다조 성에서 히라이즈미로 옮겼을 때에 건립한 것이다. 가장 먼저 다호지 절을 짓고, 중앙에 약 9m의 아마타불을 안치하고, 다음으로 약 5m의 구체 아마타불을 안치한 다이초주인을 세웠다. 계속해서 샤카도 당, 료카이도 당을 지어나갔다. 절 등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약 13년과 15년이 경과한 후에 경장과 곤지키도(金色堂)를 건축했던 것이다.
 구체 아미타불을 나열한 당은 현존하는 것으로 야마토의 조루리지 절 본당이 있지만, 히라이즈미의 것은 2층으로 된 당이었으니 그 규모는 한층 컸다고 볼 수 있겠다. 그 모든 당이 산위를 가득 메우고 있을 때의 장관을 요시쓰네는 보았던 것이다.
 오쿠 로쿠군을 지배하게 된 기요히라는 신앙심이 두터운 인물로, 오슈의 남단 시라카와세키 관문에서 북쪽의 소토가하마까지 걸어서 20일 이상 걸리는데 그 도로에 마을 단위로 부처의 사리를 안치하여 공양하는 탑인 가사소토바(솔도파)를 세워 그겉에 금색 아미타여래를 그려넣었다고 한다. 왕래하는 사람들은 주손지 절을 거쳐 다호지 절 샤카도 당의 중간을 통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신앙심을 북돋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도읍지 귀족들 사이에는 절을 짓고 불상을 조각하는 것이 유행이었고, 무인들에게도 그것이 전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실력있는 북방의 새로운 지배자는 아무것도 없었던 넓은 공간에 자유롭게 각 마을마다 소토바(솔도파)를 세워나갔는데 이것은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주손지 절 건립시의 발원문을 통해 기요히라의 발원 동기를 알 수 있다. 전대부터의 쟁란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에 그들의 사후 명복을 빌고, 적군과 아군 모두 정토에 왕생하여 불과를 얻게 하려는 기원을 담아 절을 지어, 자주 화려한 법회를 열었다. 15년이라는 세월동안 차례로 당과 탑을 지었고, 가장 나중에 곤지키도(金色堂)를 조영했다. 마룻대에 발견된 명문에서는 덴지원년(1124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요히라는 먼저 중생을 위한 훌륭한 당과 탑을 짓고나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상행삼매, 아마타정토를 형상화해서 곤지키도(金色堂)를 건립했다. 자신을 위해 지은 것이기 때문에 다른 당에 비해 규모가 작아 마치 모형을 보는 것 같다. 또한 당시 성행했던 정토신앙에서는 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정토는 부처를 중심으로 황금빛이 넘친다라고 했기 때문에 안팎 모두 금색찬란한 당으로 했던 것이다.
정토에 빛이 넘쳐나고 있다는 의미에서 불체를 금빛으로 칠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불상이 안치된 당의 안팎까지 금색으로 한 것은 동시대 수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오슈의 호족만이 실현했던 것이다. 영지 내에서 산출되는 대량의 황금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여 위엄을 나타내고자 했다기 보다는 현세에 정토를 설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주손지 절의 낙성 공양의 발원문 중에 스스로 ‘후슈의 우두머리’라고 겸손하게 소개했던 기요히라는 미치노쿠 사람의 중후한 성격으로 정토신앙에 대해서도 수도의 우아한 귀족들의 그것보다 한결같고 소박했다. 그는 금빛찬란한 당내에서 현신인 채로 정토에 있다고 느끼며 순진무구하게 희열에 둘러싸였음에 틀림없다.
 젠쿠넨노 야쿠 전투의 장군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아들 요시미쓰도 온조지 절에 아미타불당을 짓고, 죽을 때는 그 본존과 이어져있는 오색실을 손에 쥐고 편안하게 염불왕생을 성취하게 된다. 조정의 귀족 뿐만아니라 무장들도 최후를 마칠 때는 아미타불이 많은 보살과 가무하는 천녀를 데리고 보라빛 구름을 타고 맞으러 온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임종때 안치된 아미타불의 손에 걸어둔 오색실의 한쪽 끝을 손에 쥐면 그대로 극락정토에 인도된다고 믿었다. 곤지키도(金色堂)가 3대의 금관을 모신 무덤과 같은 당으로 보였던 것은 생전부터 정토라고 믿었던 당에 사후에도 있을 수 있도록 자손들이 정성을 다했음에 틀림없다. 누가 했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요리토모가 쳐들어와 죽음을 당한 4대 야스히라까지도 부친이 잠들어 있는 금관 속에 머리뿐이지만 모셔져 있었던 것이다. 기요히라가 세웠던 이 당을 현세의 극락정토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사후에도 그곳 금관에서 잠들기를 바랬던 것이 아닐까? 사실 금색의 관이라는 것도 이례적이고 특별한 것이다.
 젊은 요시쓰네가 출가승 차림의 히데히라를 따라 이 당의 마루에 앉아 있는 정경, 삼나무 숲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추는 여름의 상쾌한 아침 등 빛을 받은 이 당은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오사라기 지로 수필 전집” 제1권 (초간 ‘아사히신문PR판’ 1965년3월7일~1966년5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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