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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들이 공명을 꿈꾸던 자취 나카쓰 후미히코

 처음으로 히라이즈미를 갔던 것이 1945년 가을이었다고 나는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만 4세가 되기 2,3개월 전으로, 불가사의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연유가 있다.
 종전 전후의 일을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러가지로 이상한 분위기가 어린 마음에도 느껴졌던 탓일지도 모른다.
 8월15일의 이치노세키는 한여름의 청공이 눈부신, 무더운 날이었다. 정원의 감나무 밑에서 놀고 있을 때, 어머니가 오셔서 내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안으며 ‘아버지가 돌아오신단다. 잘됐지’라고 중얼거리듯 몇번이나 말씀하셨다. 종전을 알리는 라디오를 들으셨던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구제(旧制) 하나마키 중학교의 교사였지만, 종전이 되기 6개월 정도 전에 소집되었다. 다행히도 전방에 배치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아마 앞날이 걱정되었음에 틀림없다.
 아버지가 돌아오신 것은 그로부터 6개월 정도가 경과한 9월초의 일이었다. 전화나 전신이 몹시 불편하던 시절로, 사전연락도 없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새까만 남자의 모습에 놀란 내가 어머니께 매달렸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은 부모님 두분다 돌아가셔서 그 이유를 확인할 길이 없지만, 아버지는 한동안 복직하지 않으시고 종전이 된 해의 가을부터 이듬에 봄까지 직업이 없는 상태로 지냈셨다. 그후 현립학교의 교사로 복직하시고, 그로부터 오랫동안 이치노세키 이치코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아버지가 집에 계신 것은 아이에게 있어서는 한없이 기쁜 일이었다.
 거의 매일같이 낮부터 목욕물을 데워서 같이 목욕을 했다. 물총이나 수건으로 장난치며 노는 것이 질리면 아버지는 터무니없이 논어를 암송시켰다. 나는 의미도 모른채 반복해서 논어를 읊었다. 틀리지 않고 외우면 부엌의 찬장에서 별사탕을 꺼내오는 것을 허락해준다. 허락받으면 벌거벗은 채로 달려가서 별사탕을 한움큼 집어 가지고 와서는 아버지와 함께 먹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가을 날에 아버지께서는 ‘히라이즈미에 간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께 도시락을 만들게 하시고, 당신도 무엇인가를 준비하시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갔기에 당연히 같이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날은 안된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엉엉 울며 때를 써서 겨우 허락을 받았다.
 국도를 달리는 덜커덩거리는 버스를 타고 히라이즈미에 있는 큰 절에 도착했다. 그것이 모쓰지 절이었던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후의 일이다.
 넓은 경내에는 사람도 없었고,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있어 황폐하고 쓸쓸하게 보였다. 아버지는 잡초에 파묻혀있던 석비를 발견하면 무엇인가 작업을 시작했다. 양동이에 물을 담아와서 표면을 씻어내고, 먹물을 바르고 그것에 큰 종이를 대고 주의를 기울여 문질렀다. 지금이라면 절대로 허락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버지는 그렇게해서 탁본을 몇장인가 뜨는 일에 열중하셨다.
 그것이 바로 마쓰오 바쇼의 ‘여름풀이여, 무사들이 공명을 꿈꾸던 자취’의 구비였던 것이다. 물론 당시의 나는 아무것도 모른채 옆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었다. 문득 아버지를 보니 풀밭에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고 계셨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양쪽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 눈꼬리를 타고 풀밭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의 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본 나는 놀랐다.
 말을 거는 것도 삼가하고, 숨을 죽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던 것 같다. 얼마안되어 아버지는 몸을 일으켜 세우시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무사들이 공명을 꿈꾸던 자취’라고 중얼거리며 충혈된 눈을 비비셨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여기까지밖에 없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왜 눈물을 흘리셨던 것일까? 죽은 친구들이 생각나서였을까? 아니면 전쟁 그자체에 대한 감정이 복받쳐서였을까?
 아버지가 대학에서 바쇼문학을 전공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바쇼가 돌아다녔던 길을 답파했던 적도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생각이 깊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나는 불행하게도 고문수업을 들어야만 했고 ‘오쿠노 호소미치’를 처음부터 암기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눈물은 아마도 당신의 반평생을 되돌아보며 흘렸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전쟁에 패하고 원통한 눈물을 흘린 전우들이 800년 전의 오슈에도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언젠가 그들의 원통함을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히라이즈미 문화회의소 정보지 “동방에 있다” 제3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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