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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찬 가을바람

수도의 다이라씨 정권은 히라이즈미의 히데히라에게 요리토모를 배후에서 공격하도록 재촉해 왔습니다. 1186년에는 요리토모로부터 서간이 왔습니다. ‘히데히라는 오쿠 로쿠군의 주군, 요리토모는 도카이도의 사령관’으로 마땅히 서로를 이해하고 지켜야 한다며 절친한 것처럼 말하면서 조정에 보내는 공마・공금은 가마쿠라를 통하게 하도록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히라이즈미를, 오우를 가마쿠라 정권하에 편입시키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쨌든 히라이즈미에 히데히라가 있는한 요리토모는 가마쿠라를 움직일 수 없었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히라이즈미가 멸망하는 모습 또한 역사적이었습니다. 이듬해 10월에 히데히라는 히라이즈미노 다치에서 서거하게 되는데, 임종 직전에 구니히라와 야스히라 형제, 요시쓰네를 불러 ‘요시쓰네를 주군으로 하여 둘은 그를 따라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것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3명이 서약한 문서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려 야스히라는 요시쓰네의 머리를 가마쿠라에 보냈습니다. 야스히라의 대응을 화평노선을 선택한 것이다, 또는 패배했기 때문에 히라이즈미가 초토화되지 않았다, 야스히라는 보통의 인간이었다 등 그를 이해하고 옹호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마쿠라의 압력에 끝까지 저항도 못하고, 정권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히라이즈미를 2년밖에 존속시킬 수 없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리토모는 왜 히라이즈미를 공격해야만 했을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젠쿠넨・고산넨노 야쿠 전투 이래, 미치노쿠(무쓰)는 미나모토씨에게 의미있는 곳이었고, 오우를 제외한 64개국에 총동원령을 발하여 전국에서 군사를 소집하는 등 막부의 확고한 지반을 구축할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리토모를 따랐던 간토 무사단의 불만, 불온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히라이즈미를 없애고 오우땅을 점령하여 무사들에게 분배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절실한 이유였습니다.

요리토모가 히라이즈미에 갔던 1189년 8월22일, 때마침 태풍의 근접으로 히라이즈미는 ‘세찬 가을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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